깊이 깊이 말씀 속으로_ 델마 홀
(Too Deep for Words Rediscovering Lectio Divina)
델마 홀은 렉치오 디비나의 과정이 우리가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한 사람과 친밀해지는 과정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읽기(Lectio)는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홀로 다른 사람을 만나러 오는 것"(85)과 같습니다. 분주한 내면의 한 가운데 공간을 만들고 하나님 한분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묵상(Meditatio)는 주님을 더 잘 알기 원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묵상을 통해 신비의 영역에 계신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기도(Oratio)는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을 드러내시며 동시에 우리 자신을 (우리의 죄나 거짓 자기 등) 드러내심으로 인격적인 교제가 일어나는 시간입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주님께 말씀드리기도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도 합니다. 인격적인 사귐이 깊어지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사랑 안에서 인격적인 연합(Contemplation)을 경험하게 됩니다.
1. 읽기 (Lectio)
이것은 "거룩한 말씀", 즉 "성서"를 읽는 것이고, 읽는 태도에 대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령의 감동으로 전해지는 말에 주의를 집중하여 "경청"하고 "듣는" 것이며 말씀하시는 분(Speaker)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81)
짧은 성경구절을 선택해서 천천히 읽고 모든 주의를 집중하여 마음으로 경청한다. 이것은 내 마음과 생각을 열라고 이미 나를 부르시는 그분께 반응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83)
성서를 "듣게" 될 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분은 우리를 또한 받아주신다. 그래서 우리가 듣는 것은 말씀 그 자체가 지닌 의미 그 이상의 것이 된다. 말씀에 생기를 불어넣는 성령님 그 자체가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을 통해서 표현된다. 그것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한 구절 안에 몇 권 분량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84)
예로 든 이 성경구절 안에는 은혜로 말미암아 드러나게 될 수많은 잠재된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나의 논리적 추론으로 얻는 결과물이 아니고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이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 같이 느낄 수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마음을 평안하게 하여 한 마디, 예를 들면 "내가 여기 있다"와 같은 말씀을 의식적으로 반복하여 읽는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이 단계에서 특별히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될 때는 사랑과 신뢰의 마음가짐으로 단순히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2. 묵상 (Meditatio)
각 사람이 기도하며 예수님과 맺는 관계는 독특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개인의 은사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상상력이 더 발달되어서 그 기능을 많이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에게는 상상하는 것이 생동감 있는 묵상을 위해 더 유용한 방법일 수 있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관상(contemplation)이라고 불리는 이 방법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고전적 의미의 것과는 다른 것으로, 상상력을 이용해 복음서의 한 장면으로 들어가 어떤 인물의 이야기를 듣고 보기도 하며 주변의 분위기를 상상하고 느끼고 냄새 맡거나 만지기도 한다. 그 장면의 어떤 사람과 동일시할 수도 있고 그냥 자기 자신으로 그 장면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보고 경청하며 직접 경험할 수도 있다. 예를들면, 위에서 인용한 요한복음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께서 친구라 부른 이들과 마지막 만찬을 위해 모인 장면을 재구성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분의 응시하심을 내 눈으로 직접 마주한다. 그분이 나를 주목하여 바라보시는 그 눈길에서 나는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반응을 하는가? (90-91)
그러나 상상력이 잘 개발되지 않았거나 자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직관력을 이용해 더 많은 것을 얻는다. 그들은 성경구절 안의 진리나 가르침을 상고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반복되도록 하면서 천천히 성찰하고 그것을 마음 깊은 곳까지 내면화시킴으로써, 예수님의 분명한 사랑이 마음을 관통하게 한다. 그리고 그 사랑에 온유한 태도로 자발적인 반응을 한다. (90)
그러나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기도하든지 다음의 원리가 기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베네딕트회의 영성 지도자였던 돔 채프먼(Dom Chapman)은 한마디로 이렇게 말한다. "기도하라! 당신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기도를하라!" (91)
('기도는 기도함으로써만 배울 수 있다'는 헨리 나우웬의 조언과 같다.)
3. 기도 (Oratio)
...묵상(Meditatio)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를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우리가 모든 창조 세계 안에서, 그리고 우리 개인의 삶 가운데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알아가도록 돕는다...그러나 묵상은 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성과 상상력을 이용한 활동이기 때문에 만약 그것이 지적인 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다면 순수한 의미의 기도로는 부족한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의 목표는 그것이 아무리 숭고한 것일지라도 생각이나 개념 혹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도의 목표는 나의 가장 깊은 곳, 나의 참 자기 가운데 신비하게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 그분 자체이다. (92-93)
마음의 기도(Oratio)는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로 열어놓고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대로 온전히 자신을 내어드리는, 그래서 하나님의 행하심이 우리 자신의 행위보다 더 앞서 나가도록 준비하는 적극적인 노력인 것이다. 오랜 기간동안 우리는 묵상과 마음의 기도 사이를 오고 갈 수 있다. 그러나 점진적으로 단순해지는 때가 결국 올 것이다. 마음 가운데 사랑과 열망이 부어질 때 추론과 지적 탐색은 점점 줄고, 그것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친밀한 대화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무척 가깝게 계신다"고 인식하지만 동시에 "너무 멀게 계시다"고 느끼며 우리 마음의 갈망은 자연스럽게 그분을 향해 소리친다. (94-95)
이 기도에서 우리의 마음은 그분께로 열리고 그분에 의해 열린다. 그리고 빛이신 그분이 들어온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우리 자신의 환상을 결코 내벼려두지 않으신다. 조만간 우리 앞에 그것의 정체가 드러나게 하신다. 그것은 거짓 자기로서 스스로의 주도권을 주장하거나, 자기 충족, 제어, 교만, 다른 사람으로 사는 역할 연기 혹은 인색함이며 각 사람에게 그 형태는 다를 수 있다... 이 "환상을 깨는" 과정은 처음에는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더 크신 사랑의 은혜는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거짓 자기의 통치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참 자기가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도록 한다.(95)
마음의 기도(Oratio)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 중 하나가 이같은 거룩한 열망이 커지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그분 자신을 위한 위대한 공간을 창조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갈망 뿐 아니라 때로는 그분을 향해 보이지도 않는 길을 더듬거리며 나아갈 때 경험하게 되는 좌절과 무기력을 통해서도 창조된다. 그것은 마치 중력의 중심으로 끌리듯 심령 깊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로 끌려들어가는 것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자신의 참 자기와 기대치 못한 조우를 하게 된다. (96)
앞서 사용했던 비유인 깊이 사랑하는 친밀한 인간관계의 지속적인 발달 단계에 비추어 설명하자면, 우리는 이제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즉, 그분이 우리 삶의 중심임을 깨닫고, 연합을 향한 연인들의 갈망을 경험하기 시작하며, 온전히 자신을 주고 또 상대를 받아들이기를 갈망한다. (99)
4. 관상 (Contemplatio)
(이 시기는 오직 '여호와 앞에 종요히 앉아 그분을 갈망하며 기다리는"(시37:7) 시간이다. 침묵 가운데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본다.)
관상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들이 모두 반대인 낯설고 새로운 나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침묵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행함이 아니라 단순히 존재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배운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개념, 상상력, 감각 그리고 감정은 보이지 않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믿기 위해 포기한다.
비록 우리가 아무 일도 안하고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는, 심지어는 뭔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우리는 오히려 고요함 가운데 머물러 있도록 해야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맛보고 느끼려는 노력과 열망, 그리 인한 염려는 내려놓고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평안한 태도로 주목하며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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